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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음악 - 성가
음악과 종교는 옛날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노래, 즉 성가는 교회 의식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성당과 수도원은 중세 사회와 정치에 군림했을 뿐 아니라 음악의 중심지로도 번성했다.
교회 전례의 요소로서 낭송 선율
중세에는 로마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고 교회가 권력을 점점 더 키워 나갔다. 대성당과 수도원은 신앙만 아니라 학습의 중심이기도 했다. 성직자 외에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정규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은 성직자뿐이었다. 공식적으로 신을 경배하는 의식인 전례에서 낭송 선율은 필요한 요소였으며, 사제가 되기 위해 교육받던 남성 성가대원은 전례에서 낭송 선율을 담당했다. 수녀도 음악 교육을 받기도 했는데, 주로 수녀원의 전례에서 낭송 선율을 맡았다.
낭송에서 노래로
왕족과 귀족의 개인 예배당이나 종교 공동체를 벗어나면 이러한 성가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당시 교회의 공용어는 라틴어였는데 교회에서는 라틴어로 노래하고 반주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악보를 사용하기보다는 기억에 의존하여 노래하였다. 제창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교회의 가르침을 전달하며 일종의 명상 수련 행위였다. 라틴어로 가사에 강세를 주는 형태에서 초기의 성가가 발달한 것이었다. 특히 큰 목소리로 낭송하면서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데서 노래 선율로 발달했다. 복잡해지는 선율의 곡선을 따라 부르든 한 가지 음으로 낭송되든 성가는 명상을 촉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초대 교회의 전례는 두 가지의 유형으로 구분되었다. 일요 미사는 최후의 만찬을 재현한 것이었다. 성무일도는 성서 대목을 읽고 시편을 노래로 부르는 의식이었다. 이것은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되는 기도의식을 말한다. 전례가 좀 더 복잡한 의식으로 발전하면서 성직자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음악의 비중도 커졌다. 그리고 소년 성가대원을 양성하는 학교가 설립되었고 그곳에서 선율을 암송시키는 교육을 시작하였다. 로마의 음악학교인 스콜라 칸토룸은 성가 전통의 중심이 되었고 당시에 교회를 지배하던 로마 교황청 가까이에 설립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600년에 이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훗날 전례 음악이 된 단성 성가를 작곡하는 업적을 남겼다.
초기 성가
4세기에 로마 제국이 분할되고 교회는 동로마의 동방정교회라고도 할 수 있는 그리스정교회와 서로마의 로마 가톨릭교회로 분리되었다. 전자의 중심지는 콘스탄티노플 혹은 비잔티움, 후자의 중심지는 로마로 지역에 따라 전례 의식도 나뉘었다.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는 2개 합창단이 어떤 구절을 교대로 부르는 가창법인 교창을 선호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도 원래 그리스정교회의 관습이던 교창을 채택했다. 성 암브로시오는 전보다 찬송가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실제로 그가 그 당시의 찬송가 가운데 상당수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식적인 성가가 이탈리아 남부 베네벤토에서도 작곡되어 11세기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로마의 그레고리오 성가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그레고리오 성가로 대체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이슬람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기독교도인 모사라베가 독자적인 전례를 발전시켰다. 1085년 알폰소 6세는 이슬람으로부터 톨레도를 탈환하고 모사라베 전례 대신 로마의 전례를 따르도록 억압했다. 그러나 모사라베의 전통은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 왔고 오늘날에도 톨레도 대성당을 가면 모사라베 성가를 들을 수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전파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는 갈리아식과 로마식으로 구분되었다. 각종 수도회에 의해 로마 전례는 서유럽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전례 성가를 통합하는 데 세비야의 이시도로와 같은 음악 이론가의 가르침도 기여했다. 네우마(neuma)라는 단순한 암송 체계는 성가 레퍼토리가 방대해지면서 표준화된 성가를 마련하고 이를 성직자가 외우기 쉽게 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처음에는 글자 위 또는 아래에 점이나 획, 줄표를 덧붙였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이르러 정확한 음과 음높이를 표기할 수 있는 기보법이 만들어졌다.
성가 전통을 하나로 통합해 가는 과정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8세기 중반 롬바르드족에게 대항하기 위해 교황 스테파노 2세가 갈리아 지방을 다스리던 프랑크 왕국의 국왕 페팽을 방문하고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기 위해 북쪽으로 떠났다. 그러면서 교황청 전속 가수를 동반하였다. 그 이후의 교황들도 프랑크 왕국에 스콜라 칸토룸의 교사들을 파견해 루앙 대성당 등의 성직자를 가르치게 했다. 이러한 문화 교류는 결국 로마의 전통과 갈리아의 단성 성가 전통이 하나로 통합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통합의 결과가 오늘날까지 연주되는 그레고리오 성가다.
그레고리오 대교황
그레고리오는 로마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정치가의 길을 걸었다. 578년 그는 부제로 서임 받은 후에 콘스탄티노플에 교황의 대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과거에 로마의 카엘리아 언덕에 베네딕토 수도원을 세웠는데 콘스탄티노플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베네딕토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590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전례 의식을 통합하려 애썼고 그러한 이유로 기독교 예배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로 로마를 만드는 데도 기여했다.
교회 선법
10세기경에 8가지 교회 선법이 개발되었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그리스정교회의 선법을 고안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그리스정교회의 선법을 차용한 것이다. 교회 선법의 명칭은 그리스어로 도리아, 히포도리아, 프리기아, 히포프리기아, 리디아, 히포리디아, 믹솔리디아, 히포믹솔리디아 등이었지만 그리스의 음계와는 달랐다. 일반적으로 성가의 선율은 1개 이상의 선법에 의해 결정되었다. 선법 덕분에 수천 곡이나 되는 성가의 암송이 용이해졌다. 선법은 흰 건반으로만 연주된다. 도리아 선법은 레에서 시작하여 한 옥타브 높은 레까지 흰 건반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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